일상

종교학이 필요한 이유

vacillator 2024. 10. 27. 21:36

지금 학교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이제 학과들이 없어지네 학과라는 것 자체가 없어지네 어디랑 통합하네 그러고 있고, 갑자기 어드민 레벨에서 학제간연구라는 새로운 학과를 만들고 있고 나로서는 이래저래 낯선 변화들이 닥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종교학 자체가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없어지는 학과 중 1순위로 꼽히는 와중에,

 

나도 내가 종교학을 하는건지 사학 비슷한 걸 하는건지 문헌학은 발 끝에도 못 미치고 여성학의 아류인 것은 맞는 것 같긴 한데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도 모르겠는 와중에,

 

전혀 기대 안 하고 들어갔던 중세 관련 줌 강연에서 그래도 종교학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확신이 들었다.

 

중세 줌 강연은 중세의 건강 문제와 의학서가 어떻게 쓰였고, 이걸 현대 미술과도 관련시켜 이걸 그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어떻게 결부해 이해해야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발표자도 너무 훌륭했고 개인적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연구의 깊이도, 내가 사모하는 문헌학이랑도 연결시켜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그리고 겸손하게 발표를 진행하더라.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세에 거들;;로 쓰인 문헌인데 아무래도 출산이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 위험했을 시기라 온갖 기도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알면서 모르면서 눈 감아주면서 온갖 기도와 주술을 산모의 안전한 출산과 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위해 사용했다. 중세 거들로 쓰인 문헌은 두루마리처럼 길게 만들어져 이걸 허리에 두르거나 속옷처럼 성기 주위로 두를 수 있게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 그 전까지는 직접 몸에 둘렀을 거라는 것이 가정이었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단백질 검사를 해봤더니 신짜로 신체에 착용해왔다는 것이 밝혀졌단다.

그리고 아무래도 문헌 자체도 귀하다보니 이걸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기 보다는 마을 공동체가 함께 소유하고 대를 이어 쓰여왔을 것이라는 점.

 

근데 Wellcome Library에 있는 3m짜리 중세 문헌 거들-_- 이건 인간적으로 찰 수가 없잖아! 그래서 아무래도 의례 상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왜 이게 3m씩이나 되는지, 발표가 끝나고 질문과 논의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내 생각에서는 종교학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해볼만한 질문이라서 망설였던 질문을 해보았다. 아니 이건 너무 당연한 건데, 발표 때 내가 놓쳤을 수도 있고, 이건 온 세계 만민이 다 아는 사실인데 나만 모를 수도 있잖아. 3m가 된 건 혹시 있던 문헌에 사람들이 다른 문헌 또 붙이고 또 붙이고 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종교학에서 의례나 문헌 연구할 때 응당 생각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뭔가 싱통방통하고 더 잘 들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으면 문헌이나 물건을 변형한다. 그리고 뭘 잘라내는 것보다는 뭘 덧붙이는 게 흔하지. 

 

근데 진짜 이 중세학 하는 사람들이 그걸 생각해보지 않은 거였어! 발표자가 한 번 확인해보겠다고 했고 다른 줌 참여자는 화면으로 봐도 두 개의 문서가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의례적인 특성인 것 같긴 한데 이게 정확히 종교학적인 질문이냐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뭔가 나로서는 아 종교학이 할 일이 아직 있구나, 여러 학문에 걸치다보니 어중이떠중이가 되어 버리기가 십상인데(나만 그런가) 그런 여러 군데 발 걸치는 포지션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싶어서 혼자 반가워하고 혼자 안타까웠던 순간이었기에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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